작성일 : 23-01-31 10:22
[169호] 여는 글 - 꾸준한 노력 = 비관적 낙관주의?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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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노력 = 비관적 낙관주의?

오문완


회원 여러분이 이 글을 접하는 건 이미 설이 지났을 때라 이 글을 대하는 느낌이 저하고는 다를 게 분명합니다, 라고 밑밥을 깔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설을 앞두고 이 글을 쓰는 처지라 무언가 희망의 이야기, 아니면 덕담(德談)이란 걸 들려드려야 할 터인데 세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말이면 교수신문에서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소개되죠. (작년) 12월 13일에 올라온 글은 이렇습니다. “금년도에는 '과이불개'(過而不改)가 뽑혔다고 합니다. 과이불개는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로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는 뜻의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의 탓을 하는 사회풍토를 비판하는 말로 들립니다.” '과이개'(過而改)가 돼야 할 텐데요.

은근슬쩍 성당 얘기를 하면 싫어할까요? 그런데 제목으로 잡은 <꾸준한 노력>이 제가 다니는 성당에서 나온 이야기라 제 얘기가 도움이 될 거라는 ‘자뻑’(?!) 버전으로 밀어붙입니다. 성당에 레지오(Legio; 로마군단)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성모님의 군대’(Legio Mariae)입니다. 군대 조직이다 보니 분대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개별 단원들은 쁘레시디움(Praesidium)이라는 파견대에 소속하게 됩니다. 로마군단과 가톨릭교회가 뭔 상관이여(?), 물으신다면 할 얘기가 없어지는데 그만큼 충성과 결속을 뜻할까요? 여하간 예수님과 성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각 쁘레시디움은 매주 정해진 날에 1시간 회합을 갖습니다.(그래서 ‘주회’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면 짱돌을 맞을 터이니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회합 순서 중에 훈화(訓話)라는 게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듯 신부님이 ‘거룩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보통은 인쇄된 문건을 단원이 읽습니다. 지난주 ‘훈화’ 제목이 ‘꾸준한 노력’이었습니다.(멀리 돌아서 이제 ‘꾸준한 노력’에 왔군요. ‘헤어질 결심’ 아닙니다.) 이런 내용입니다.(일부를 베낍니다.) “꾸준하게 간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이 받을 것이고, 얻을 것이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려는 은총을 오랜 기간 동안 찾고 간구하는 이들에게 마련해주시며, 매우 고귀한 은총은 훨씬 더 오래 미루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은총을 한층 더 증가시키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은혜를 받는 사람이 그 은총의 진가를 알고 고맙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은총을 받은 영혼들이 진실로 그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주 작은 노력으로 빨리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진가를 인정하지 않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꾸준히 간청하며 인생 여정에서 조금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그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간절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할 때 은총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간절하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끊임없다는 게 언제까지인지는 저도 모르죠.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느님만 아실 터이니. 알지도 모르지만 그 근사치(近似値)에 가깝게 갈구(渴求)할 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

거룩한 천상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속세로 돌아와 볼까요. 2차 대전 때 나치의 수용소에 갇혀 죽을 고생을 하다가 살아남은 사람 중에는 작가나 사상가가 된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 치료)를 생각해 낸 빅토르 프랑클(Viktor Emil Frankl)이라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로고테라피는, 간단히 말하자면 삶의 의미를 찾을 때(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불안(정신병)에서 벗어난다는 치료법입니다. 이분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소개하면서 로고테라피를 얘기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까요? 수용소에서도 차를 마시는 시간은 있습니다. 따뜻한 물로 차를 타서 흡족하게 마신 사람과 반은 차를 타 마시고 반은 용모를 다듬은 사람 중 누가 살아남았을까요? 굳이 답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비록 갇혀 있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존엄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체험을 들려주고 싶은 게지요.

이건 어떤가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갑니다. 또 한 사람은 꼭 같은 신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1944년 크리스마스 때는 해방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아시다시피 2차 대전이 끝난 건 우리 광복절인 1945년 8월이고,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건 같은 해 5월입니다.) 수용소를 나서는 날짜를 확신한 사람이 그 확신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절망감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말 휴거 대소동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낙관주의(樂觀主義)와 비관주의(悲觀主義)입니다. 회원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항상 어정쩡한 저는 비관적 낙관주의자입니다. 이건 ‘꾸준한 노력’파이기도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확 뒤집어야 하나요? 아니면 꾹 참아야 하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고 고쳐달라고 악악대야 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실은 위정자(爲政者)를 비롯한 가진 사람들도 나름 악악대왔고 그래서 세상을 이렇게 후퇴시키고 있는 거겠지요. 그래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 겁니다.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데(저는 피가 나오는 드라마는 잘 안 봅니다.) 극 중 동은(피해자)이 연진(가해자)을 향해 이런 독백을 건넨답니다.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는 어느 쪽이 더 견고할까?”

다 같이 꾸준히 악악댑시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 하나. 지치지 않으려면 유머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거. 이런 노래가 위로가 될까요. 유튜브로 들러드립니다.
임재범의 <살아야지> https://www.youtube.com/watch?v=NDmv36Xsn8g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오문완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인권연구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