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박래군 저 / 클 2022 / 정리 : 윤영해
이 책에서는 이 땅 곳곳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남아있음을, 그 상처들은 아무리 모른 척해도 언젠가 입을 열고 말을 하게 될 것임을 알리고 싶었다. 우리가 상처 입은 이들이 직접 말을 할 수 있도록 연대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세상은 보다 인권적이 될 것 같다. - 머리말 중에서
백산은 해발 47.4 미터밖에 안 되는 매우 낮은 산이다. 백제가 망한 뒤 유민들이 백제 부흥운동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그때 산을 빙 둘러서 타원형으로 테뫼산성(산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축조된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학농민군은 무장읍에서 최초로 기포(동학교단은 포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다)하고 말목장터에서 1천여명이 운집해서 집회를 한 뒤에 이곳으로 이동했다. 지옥 같은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면서 오히려 난리를 기다렸던 수많은 민중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그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처럼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일어서게 되면 흰옷 입은 무리들이 보일 것이고, 앉으면 죽창이 숲처럼 보였을 것이다. 앉았다 일어나면서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같은 구호를 우렁차게 외치지 않았을까? - 「인권의 지평을 열어젖힌 갑오년」 중에서
해미국제성지를 나와 오른편에 있는 자리개 돌을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이 있다. 그 연못의 이름은 진둠벙이다. ‘죄인 둠벙’으로 불리던 게 훗날 이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진둠벙 연못 옆에는 검은 돌로 된 좌석 100여 개가 줄을 맞추어서 놓인 노천성당이 있다. 유해 발굴지에서 나온 돌을 깔아놓은 것이다.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면 숙연한 분위기가 저절로 조성될 것 같다. 그 불편한 자연석 위에 앉아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미사만큼 신앙심을 돋우는 기도가 있을까? 이곳이 국제 성지로 지정될 만하다 싶었다. 성지 안에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도 있고 곳곳에 순교자를 기억하는 차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진둠벙이 있던 곳을 포함해 이 지역의 지명은 ‘여숫골’이다. 순교를 당하는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마지막까지 간절히 외치며 죽어갔는데 그 소리를 사람들이 “여수머리”로 잘못 들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 「죽음에 맞선 믿음 – 천주교 병인박해 순교 성지」 중에서
어느 시대에나 차별할 때는 상징이 있었다. 그것이 양반, 평민의 갓과 백정의 평량갓으로 나타났다. 갓과 망건은 말총(말의 꼬리털)으로 만들어서 쓰던 것이고 평량갓은 대나무로 만들어서 쓰던 것이다. 백정은 절대로 갓을 쓰지 못하고 평량갓만 써야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 백정해방령을 공포했다. 이때부터 백정도 갓을 쓸 수 있었다. 이게 너무 좋아서 갓을 밤에도 쓰고 잠을 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연상된 것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복장 구분이었다. 그렇게 정규직이 아니라는 표지를 달게 되면 식당과 휴게실만이 아니라 대우까지 달라진다. 사회 곳곳에 이런 차별들이 넘쳐난다. - 「최초의 소수자 인권운동 단체 – 진주 형평사 현장」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이다. 무덤의 길이만 1킬로미터라는 대표적인 학살터이다. 대전 산내에서 식장산을 넘어 옥천으로 가는 2차선 변에 있다. 요즘에는 공식명칭인 곤령골보다는 골령골이라는 지명이 더 유명하고 지도에도 골령골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왕이 입었다는 곤룡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곳의 원래 지명은 곤룡골이었고 그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천의 이름도 곤룡천이었다. 그런 것이 전쟁 시기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골령골로 불렸다. 옥천으로 가는 고갯길도 ‘뼈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람 뼈가 워낙 많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골로 간 사람들–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 중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처음에 알려지게 된 현장을 찾아갔다. 울산시 울주군 청량읍에 있는 현장은 폐허로 남아있다. 삼정초등학교 옆 공터에서 언덕으로 올랐다. 삼정초등학교는 2002년에 개교했고, 인근에 쌍용하나빌리지아파트 단지는 1999년에 입주를 했다. 그렇다면 사건이 날 때 이곳은 그야말로 사람이 살지 않는 산골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집단수용된 186명의 원생들에게 기합을 주면서 작업을 시키는 모습을 김용원 검사가 목격한 것이 형제복지원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발단이다. - 「사회복지시설에서 일어난 일들 –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터」 중에서
성병 관리소를 ‘몽키하우스’로 부른 건 미군들이었다. 자신들이 성적 만족을 위해서 데리고 놀던 여자들이 원숭이처럼 우리에 갇혔다고 놀린 것이다. 미군 위안부들이 가장 싫어했던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페니실린을 맞고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의사들이 페니실린 주사를 놓기를 꺼려하자 정부 당국이 나서서 의사들의 면책을 추진한다. 정부가 봐줄 테니 죽든 말든 페니실린 주사를 놓도록 했고, 그 주사가 여성의 몸에 얼마나 안 좋은지를 잘 아는 의사들은 정부를 믿고 주사를 놓았다. 이곳의 미군 위안부들은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테두리에서 배제되었다. -「그 많던 ‘순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 동두천 미군 기지촌」 중에서
나는 유가족과 부상자와 구속자와 쫓겨나서 흩어진 철거민과의 어려운 관계들을 풀어나가야 하는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이었다. 우리가 그때 내세웠던 구호가 “여기 사람이 있다”였다. 그 구호는 지금 전시관 벽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망루 위에 올라간 철거민들을 사람들이 보았다면,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면,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 곳으로 보았다면, 그때 진압이 아니라 구조를 했다면 용산참사는 없었을 것이란 점에 착안한 구호였다. -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 – 광주 대단지 사건과 용산참사 현장 그리고 백사마을」 중에서
생을 마감한 이소선의 무덤은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의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41년을 기다려 모자가 상봉하는 것 같은 위치다. 이소선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 되어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루어주세요. - 「노동 인권 운동가 이소선의 연대 – 서울 청계천, 구로, 창신동」 중에서
지금까지는 한국 현대사는 정부 공식 입장, 즉 국가적 관점에서 읽어왔다. 이것의 문제는 현대사를 일구어온 주체인 국민-사람이 빠지게 된다.
국가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으로, 체계의 유지가 아닌 저항의 관점으로 그리고 이를 통한 인권 정신의 회복과 실현, 증진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본다면 역사는 달리 보인다. 특히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현대사를 읽으면 어떨까? 억압과 탄압을 뚫고 피해자들은 입을 열고 부정의를 바로 잡으려 한다. 그래서 우리 과거의 역사는 종료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쓰여 지는 것이다. - 작가의 대화 강연 중에서
※ 윤영해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부설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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