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11-07 18:22
[166호] 인권 포커스 Ⅱ - 기후위기, 인권의 관점에서 책임을 묻고 행동하기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2,460  

기후위기, 인권의 관점에서 책임을 묻고 행동하기

정록


오랫동안 ‘기후문제’는 자연 과학자들의 영역이었다. 복잡한 그래프와 수많은 온실가스 종류들, 배출량에 따른 대기의 변화를 나타내는 여러 지표들은 지금 보더라도 ‘과학자’들의 영역이다. ‘기후변화’가 가져올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과학자들의 영역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높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환경단체들은 북극곰, 펭귄을 앞세워 기후문제를 알리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문제로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기후문제’는 과거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의 문제’라기보다는 머나먼 곳에 사는 ‘귀여운 동물’들의 문제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 지구온난화, 기후변화에서 기후위기, 기후재난으로

하지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인간만 비켜갈리 만무했다. 폭염과 태풍, 가뭄과 혹한이라는 ‘이상기후’의 다발 속에서 우리 모두 ‘기후변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기후위기’를 직감하고 있다. 2020년에 50일 넘게 이어진 장마, 매년 강도를 더해가는 동해안 산불, 이번 여름 수도권을 침수시킨 폭우를 겪으면서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감각. 30년 전부터 과학자들이 경고했지만, 결코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 말들이 번역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기후재난은 꽤 오래전부터 남반구 지역에서 빈발해왔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몰위기의 섬나라들뿐만 아니라, 상당수 남반구 국가들이 장기간의 가뭄과 자본주의적 농업 수탈로 인해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하고 사회가 불안정한, ‘살고 싶지 않은 지역’으로 남반구를 타자화했고 그런 한에서 남반구 주민들의 삶은 북극곰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유럽과 북미, 중국 등을 강타하고 있는 기후재난을 보고서야 우리는 기후위기와 기후재난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후위기 대응의 필요성 여부는 쟁점이 아니다. 다들 기후위기라며 이런저런 대응방안들을 내놓는다. 2020년 6월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가 ‘기후위기비상선언’을 발표하고 9월에 국회는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을 의결했다.

10월에 정부는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다. 2021년에는 ‘탄소중립 녹색성장법’ 제정과 ‘2050 탄소중립위원회’ 출범,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발표가 이어졌다. 기업 광고의 상당수가 ‘녹색’을 앞세운 금융,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대기업들의 탄소중립, 친환경 경영에 대한 장밋빛 포부들이다.

다들 요란스럽게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내세우고 있지만, 늘어나는 전기차 말고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변화가 무엇인지 체감하기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19로 주춤했던 온실가스 배출량은 다시 치솟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인류가 기후위기 앞에서 집단행동이냐, 집단자살이냐 갈림길에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는 기후위기, 기후재난으로 우리의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기후문제에 직면할수록 겪게 되는 문제의 심각성과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는 총체성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기후위기에 맞서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지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 인권의 관점과 원칙은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 인권의 관점에서 기후위기의 책임 묻기

일반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해법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이를 없애거나 변화시키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원인으로는 온실가스가 가장 먼저 꼽힌다. 석탄, 석유, 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지구온도를 지난 200여 년 동안 급격히 상승시켰다는 것이다. 인류가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혁명을 통해 일상생활의 커다란 풍요와 진보를 이뤄왔지만, 환경파괴와 물질만능주의와 같은 부작용도 초래했다는 익숙한 서사가 기후위기 문제에서도 반복된다. 기후위기는 화석연료를 사용한 인류 모두의 책임이 된다. 또는 잘 사용해왔던 화석연료, 탄소 자체가 갑자기 악당이 된다.

이는 일면 사실이지만,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인권의 관점에서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고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 분명히 하는 게 필요하다.

현대인권체계에서는 국가를 인권보장의 의무/책임 주체로 명시하고 헌법에서 기본권으로서 평등, 자유의 권리를 나열한다. 이러한 책임 주체의 반대편에는 보편적 인권의 권리 주체로 공동체의 시민들이 등장한다. 국가 또는 정부를 적극적인 의무/책임 주체로 등장시키는 것은 현실의 권리관계가 결코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화석연료의 사용은 어떤가? 화석연료로부터 벗어나 공동의 인프라로서 도시의 냉난방 시스템을 새롭게 구성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전기차를 구매할 권리가 아니라, 재생에너지 중심의 공공교통을 구축할 권리가 있는가? 전력 소비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산업생산에서 화석연료가 아닌 다른 대안을 논의하고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나? 매일 일터에서 겪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들을 떠올려보면 답하기 그리 어려운 물음도 아니다. 질문은 다시 이어진다. 애초에 화석연료는 어떤 필요에서 선택되고 누가 선택한 것인가? 노동력과 원료를 구매하는 자본가들이 투입비용 대비 최대 산출을 얻기 위해 ‘발견’하고 ‘선택’한 에너지원이 석탄, 석유, 가스이다. 그 결과 재난과도 같은 기후위기를 맞고 있지만, 지금도 화석연료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에너지 위기 속에서 이들 기업들은 역대급 영업이익을 올리고 있다.

자연의 거대한 변화처럼만 여겨졌던 ‘기후위기’도 여타의 사회문제들과 다르지 않은 ‘불평등과 부정의’의 문제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권적 관점과 접근은 ‘인권취약계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겪게 되는 기후재난의 피해라는 협소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기후변화의 피해도 더 크게 겪게 된다는 누구나 짐작 가능한 사실을 ‘인권’으로 포장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기후위기는 바로 지금 자본소유자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오직 이윤만을 위해 선택한 화석연료와 대량생산 시스템이 초래한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도 여전히 사회의 생산과 유통, 소비 시스템을 손에 쥐고 있는 그들로부터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종식보다 세계의 파멸이 더욱 가능성 있는 현실처럼 여겨지는 무기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권의 울림과 연대의 가능성으로.

※ 정록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