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12-29 13:04
[168호] 여는 글 - 멈춰진 시간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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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진 시간

박영철


21세기가 ‘인권의 시대’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제사회는 전쟁의 참상을 딛고 74년 전 오늘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핵심적 가치로 ‘인권’을 들어 올렸다. 야만과 탐욕, 압제로부터 숨죽여왔던 수많은 시간들을 넘어, 존엄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권리를 선언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야만의 시대를 넘어서 문명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74년의 시간을 통해 ‘인권’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 국제사회의 질서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설정했다.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법에 의한 통치에 의하여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세계인권선언 전문에서는 인권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법치를 강조하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한 그 어떤 자의적 해석과 억압도 인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국제사회는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며 법치를 통해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보장하는 제도와 정책을 발전시켜왔다.

이승만 정권 이후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 또한 인권을 확장하는 시간들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유린했던 자본과 국가권력 그리고 이에 기생했던 수많은 권력과 악습에 맞선 투쟁의 역사였다. 그렇게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한발 한발 전진해 나아갔다.
엄혹했던 1990년대 무수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권단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인권의 목소리를 높여냈다. 인권을 중시하는 국제사회의 경향에 맞춰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고 ‘빨갱이’로 치부되던 ‘인권’적 주장이 보편적 가치로 세상에 울리기 시작했다.
2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속에서 국가의 인권보장체계는 빠르게 자리잡았으며,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와 공기업, 심지어 기업까지 인권보장의 책무를 담지한 다양한 영역에서 제도가 마련되고 정책이 시행되었다.
인권을 지키고자 나섰던 수많은 인권옹호자들의 노력을 통해 인권은 보편적 권리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외침이 터져 나오면서 ‘인권’에 대한 다양하고 새로운 시선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모색되었다.

하지만...
2022년 대선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멈췄다. 아니 요즈음 유행하는 타임슬립 드라마처럼 8~90년대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순간순간 등짝이 오싹할 정도다.
“공정과 상식”, “자유와 인권”을 외치며 집권에 성공한 보수정권은 국제사회의 기본적 질서를 아전인수식 해석을 통해 심대하게 왜곡시켰다.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공정과 상식”은 사라졌으며, “자유와 인권”의 본래적 의미는 퇴색되고 위력에 의한 선택적 ‘자유’만이 남겨졌다. 법은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칼날일 뿐, 더 이상 ‘만인에게 공평한’ 잣대의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는 오간 데 없고, 국가는 왜,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케 할 정도다.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지 우리 사회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민주주의가 야속할 뿐이다.

2023년, 멈춰진 시간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이후 어떠한 사과도 진상규명도 없이 그렇게 시간은 멈춰섰지만 기필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12월 8일 노옥희 교육감의 갑작스러운 비보 이후 울산의 진보교육 역시 속절없이 멈춰섰지만, 결코 이대로 멈춰서는 안된다. 2023년에는 반드시 시민들의 선택으로 선출된 노옥희 교육감의 정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인권의 이름으로 멈춰진 시간을 다시 돌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역사를 되돌리지 못하게 오늘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 박영철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