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6-03 14:34
[173호] 시선 둘 - 진주형평운동 100주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상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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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사무국
조회 :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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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형평운동 100주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상기행
포로리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연대는 인권운동 단체로써 충실한 곳이지만 맞춤형 여행기획사로는 독보적인 곳이다. 그래서 나는 거리 두기 기간 내내 인사 대신 ‘언제가요? 나 빼고 가면 안 되는 거 알죠. 연락 꼭!’ 이란 말을 하고 지냈다.
다들 알고 신청하셨습니까?
공지와 동시에 신청부터 하고 출발 날을 기다리고 있자니 한 번씩 ‘형평운동’이 뭐지? 공평도 아니고 ‘형평’ 이라니 낯선 단어네. 올해가 100년이라는데 50주년, 70주년 때는 왜 몰랐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연대가 알려주고, 먹이고 재워 줄 거라는 믿음으로 무심코 지냈는데 포털 기사 제목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 '백정도 사람이다’ 전국 휘몰아친 100년前 형평운동” , ‘세계인권선언에 20여년 앞서···‘인권 해방은 근본 사명’ 부르짖은 형평사“, ”형평운동 100년…‘공정과 상식, 여전히 필요한 가치’”, “형평운동이 추구한 공평, 애정의 가치 이어가야”, “100년 전 진주서 싹튼 형평운동 인간존엄 되새기다” 등등.
앗 엄청난 타이틀.
그간 나만 모르고 지낸 것인지, 다른 것들처럼 한 때 알았으나 이젠 잊은 것인지, 기념회 홍보가 잘된 것인지. 어쨌든 사람들에게 ‘몰랐다’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그렇게 이번 기행은 부끄러움과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根本)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梁)이라.”(형평사 설립취지문, 1923. 4. 25.)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글을 보는 순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1945. 12. 10.)라는 세계인권선언문 1조가 떠올랐다.
결국 같은 얘기.
그 즈음 세상분위기가 이러하였다 하더라도 기사처럼 20여년의 시차를 두고 이 땅에서 정리해낸 인권 개념이고 당사자 외침이란 의미에서 반가운 발견이었다. 그간 인권의 역사라며 알려진 것들은 대체로 서양의 역사 중 그것도 유럽의 사건과 맥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너무 종교적이거나 와 닿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형평운동을 떠올리면 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 10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새로이 찾고 교정한 것이 많았다는 경상국립대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토록 알려지지 못한 사연이 무얼까 싶었다. 지난 100년 사이 우리 땅에는 일제강점과 철수, 전쟁, 독재, 산업화, 도시화가 있었고 특히 진주지역은 교육도시를 꿈꾸었는데, 글도 배우지 못하고 소 잡고 가죽 벗기던 백정이 주축이 된 이 운동이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건보다 곱절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전시물 중에는 당시의 사진이 여러 장 보였는데, 일부는 백정가족의 골격이나 모습에서 유전학적 열성특성을 찾으려 한 우생학자가 찍어 놓은 것이어서 섬뜩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모진 세월을 사람도 사건도 겪은 것이다.
이후 우리 일행은 상상의 타임머신을 탄 마음으로 진주 시내를 쏘다녀야 했다. 박물관 밖을 나오니 어디에도 오롯이 남아 있거나 환영받는 장소는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형평운동 연구가인 김중섭 교수님의 머릿속을 지도삼아 산기슭과 도심 외각을 오가며 기념탑도 찾고 활동가 묘소도 그야말로 찾아내야 했다. 그마저도 흔적이 없으면 각자의 상상력을 발취해 백정마을을 그려보고 전국 형평운동 대회가 열렸던 진주좌(일본식 극장)을 지었다 허물었다 해야 했다.
‘냄새가 선을 넘지...’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이 하는 말이다.
진주형평운동 당시 이미 신분제는 철폐되었지만 백정들이 교회로 들어오자 기존 신도들이 나가버린 사건(동석예배거부사건)은 선교사의 중재로 3개월 만에 동석예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소고기불매운동, 대외적 고립, 행사거부, 집단폭행 등 당시 백정은 그래도 백정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딱 내가 허락하는 만큼의 인권만 누리길 바라는 100년 묵은 그 마음을 지금도 간직한 사람이 있다. 아파트 놀이터에 담을 높이고 자물쇠를 채우고는 당당한 ‘넘어오는 게 싫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것이 다음 인권기행을 기다리는 이유이다.
세상이 나아지기는커녕 거꾸로 가는 듯해서 무기력해 질 때, 일상을 툭 떠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알게 된다. 아주 느리지만 세상은 사람의 조건을 하나씩 지워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특별히 이번 기행은 19개월 아동과 함께해서 거창하고 멋진 구호가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는 지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모두 선한?!
※ 포로리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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