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7-28 16:59
[199호] 인권포커스 Ⅰ - 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재난에 대처하는 인권 기준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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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사무국
 조회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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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왜 인권에 기반한 접근이 필요한가
국가의 재난관리 체계는 예방-대비-대응-복구라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든 단계에서 고려되어야 할 기준이 바로 ‘취약성’(vulnerability)이다. 한 사회가 가진 취약성의 정도가 재난의 규모와 양상, 회복력의 정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지닌 재난 취약성은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된다.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 삶을 다시 일으키기가 더 어렵다.
폭우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삶터를 잃는 게 아니다. 갑작스럽게 내린 많은 비는 자연의 현상이지만 폭우가 빚어내는 재난의 양상은 그 사회가 지닌 취약성이 모인 결과이다. 2024년 SBS 취재 결과, 장애인, 노인 등이 생활하는 복지시설 1만 2천여 곳 가운데 838곳, 전체 7% 정도가 침수 위험 지역 안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이 들이닥쳐도 재빨리 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침수 위험 지대에 살도록 방치된 셈이다. 재난을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재난은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는 비상 상황일 뿐 아니라 대처를 위해 취해지는 조치가 언제든 또 다른 인권침해나 차별을 낳을 수 있는 시간이다.
∙ 재난의 전국면에서 ‘취약성’또는 사회적 위험 요인을 고려해야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 특히, 위급 상황에 놓인 재난 피해자에게는 그들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여 존엄을 보 장하고 2차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접근이 요구된다.
재난 피해에 대한 지원방식은 단순 시혜에서, 필요 충족으로, 지금은 인권에 기반한 접근으로 발전해 왔다. ‘인권에 기반한 접근’은 재난 피해 지원과 예방의 전 국면을 권리와 의무의 관계로 전환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변화를 만든다.
먼저 필요의 충족을 넘어 인권의 보호와 증진, 존엄의 회복이 전 과정에서 목표가 된다. 즉 인권과 인간의 존엄이 목표이다.
둘째, 재난 피해자의 위치변화이다. 재난 피해자를 권리 주체로 보기 때문에 ‘피해자 중심성’이 재난 지원에서의 핵심이 될 것을 요청한다.
셋째, 의무 이행자의 등장이다. 재난 예방과 피해 지원은 국가의 선의나 아량이 아닌 책무가 된다. 넷째, 민주주의를 통한 해결책 발견이다. 재난의 반복을 막는 고리는 관료와 전문가의 판단에만 맡겨둘 게 아니라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와 국가에 대한 견제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재난에 대한 조사, 회복, 예방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시민의 참여와 국가와의 협력이 이루어져야한다. 이때 시민뿐 아니라 피해 당사자도 ‘변화를 요구하는 자’의 위치를 갖게 된다.
# 재난 현장에 비추어 본 인권 기반 접근의 중요성
‘인권에 기반한 접근’에는 재난 현장에서 무수히 반복되어 온 반인권적인 접근들에 대한 반성이 녹아 있다. 재난에 대한 대응뿐 아니라 재난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재난을 막기 위해서도 인권에 기반한 접근은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 10·29이태원참사 159번째 희생자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이재현은 이태원참사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였다. 여자친구와 절친을 참사 현장에서 잃었다. 그는 참사 43일 후인 12월 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재현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재난 피해자에 대한 인권 기반 접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 경찰의 대응
참사 바로 이튿날, 경찰이 조사차 병원으로 이재현을 찾아왔다. 경찰은 그의 곁에 있던 부모님을 병실 밖으로 나가라고 해서 그는 50분여간 홀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경찰은 가족 및 교우관계, 음주 및 흡연 여부, 마약 투약 여부 등을 질문했다. 경찰이 던진 질문들은 참사의 피해자가 아닌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질문이었다. 여자친구와 절친의 생사를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재현의 마음을 짐작해 볼 때 조사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피해 방지 또는 피해 최소화의 원칙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린 재난 피해자에게 매우 차별적이었으며 피해자를 낙인찍는 조사 방식이었다.
∙ 의료계의 대응
보건복지부에서 트라우마 긴급 진료 체계를 마련하고 개인별 심리검사가 진행되었다. 이재현의 부모가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움을 요청하자 ‘그냥 깊은 관심을 가져라’라고만 조언했다. 심리검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재현은 4시간 동안 받은 검사에 800여 문항이 있었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PTSD 척도를 비롯한 정신건강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질문지였다고 보이나, 이와 같은 검사 방식 자체가 생존자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 국가의 대응
정부는 ‘토끼 머리띠’라는 유언비어에 따라 생존자들을 조사했다. 참사 당일 참사 현장에 관한 유언비어나 탈의된 시신 영상 등을 일부 언론이 그대로 보도했다. 또한 MBC는 “이태원에서 약이 돌았다는 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터뷰를 사실 확인도 없이 보도했다. 이와 같은 정부와 언론의 태도가 이태원이란 장소에 대한 세간의 편견과 ‘놀러 갔다 죽은 사람들’이라는 낙인을 더욱 부추겼다. 희생자나 생존자를 모욕하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시스템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이재현은 인터넷에 남겨진 악성 댓글에 진실이 아님을 알리는 댓글을 다느라 고군분투했다.
3-2. ‘인권에 기반한 접근’을 말하는 국제기준
# 재난 위험 경감을 위한 지도 원칙
2015년 채택된 「센다이 프레임워크(2015-2030)」는 국제적인 재난 경감 전략의 목표로 ‘재난 취약성 예방’과 ‘복원력 강화’를 통해 사회 전 분야를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대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위험 불평등을 해소하는 인권 정책이 경감 전략의 핵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센다이 프레임워크」 19번에서 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지도 원칙으로 제시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국가에 국제 협력을 통해 재난 위험을 예방하고 경감시킬 일차적 책임이 있으며, 국내 각 부문과 책임을 공유할 것, 사람, 건강, 생계수단, 발전권을 포함한 모든 인권의 증진과 보호를 목표로 할 것, 재난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 행정, 입법 등 모든 기관의 전면적 참여와 협력이 요구되며, 민간과 공공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할 것, 여러 위험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이해하고 위험 정보를 갱신할 것, 사후 대응이나 복구보다 근본적 재난 위험요인에 대처할 것, 재난 위험에 대한 공교육 실시와 시민 인식 강화에 힘쓸 것이다.
# 재난 상황에서도 준수되어야 할 국제인권기준
재난 상황에 특화된 국제기준을 기억하고 준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존 국제인권규범이 제시한 기준들이 긴급한 재난 상황에서도 경시되거나 축소되어서는 안 됨을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다. 인권의 보호와 증진은 사후적으로 달성되어야 할 장기적 과제만이 아니라 재난 상황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에서 지켜져야 할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감염병 재난 시기에 건강권은 단지 바이러스를 퇴치함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에 따라 설치된 사회권위원회가 건강권에 대해 발표한 「일반논평 14호」(2000)은 건강권을 다른 인권의 행사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기본적인 인권임을 확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주거권, 노동권, 교육권, 생명권, 차별금지, 정보 접근권, 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권리의 보장도 건강권 실현을 위해 필수적이다.
2020년 코로나19 감염병이 국내에 폭발적으로 확산했던 초기 상황을 돌아보면 국가의 작위 또는 부작위가 시민들의 건강권과 생명까지 크게 위험에 빠뜨렸던 상황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적 마스크가 보급되기 전까지 마스크 대란과 가격 폭등 상황이 발생한 점, 병상이 부족해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발생했고 공공의료원이 코로나 병동으로 전환되면서 노숙인들이 의료원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점, 이주민은 재난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었던 점, 감염경로나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노출함으로써 오히려 감염을 우려한 시민으로 하여금 공중보건체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던 점, 백신 피해로 의심되는 사망자가 다수 나왔다는 점 등을 떠올리면, 감염병 재난과 공중보건의 위기는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빈약한 공공 보건의료체계와 사회 안전망, 인권 정책의 미비 등이 함께 빚어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재난은 언제든 다시 다가올 수 있다. 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모든 정책의 검토 기준도, 재난 대응을 통한 도달 목표도 인권 보장이 되어야 한다. 재난 상황에서도, 아니 재난 상황일수록 인권은 유예되거나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 이 코너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인권교육센터 들’이 연구하여 제작된 <재난 인권교육을 여는 안내서 ‘재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시간’>을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이번 글은 안내서 1부. 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중 ‘3. 재난에 대처하는 인권 기준을 찾다’를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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