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
한스 페터 그라베르 저, 정연순 옮김 / 진실의힘 2025 / 정리 : 박영철
이 책은 1부 법치주의에 대한 전쟁, 2부 불의에 대한 판사들의 책임, 3부 판결의 도덕적 측면 등 크게 세 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판사들이 억압에 가담하는 것은 독재정권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국가안보를 위해서 또는 사회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자유주의 사회의 판사들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을 한다.
이런 사례는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이 나치 독일이나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 정권처럼 노골적으로 억압적인 나라에만 나타나는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모든 국가와 사회에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20쪽에서 판사들의 태도가 왜 잘못됐는지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책을 시작한다.
“많은 판사가 재판을 통해 억압적 법률을 지지하고 폭정을 정당화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자신이 법치주의를 수호한다고 믿는다. 이 책은 판사들이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 태도가 왜 잘못됐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첫째,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권력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사법부가 가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둘째, 억압에 협력한 판사들을 법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셋째, 도덕의 관점에서 판사들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이 억압에 맞서도록 독려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판사들이 정부의 억압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저자는 불의에 가담한 판사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폭넓게 논의한다. 원론적으로 판사가 재판을 통해 심각한 인권침해를 일으킨 경우 처벌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판사에게는 사법적 면책특권이 있다. 판사가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법을 적용하려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판결할 수 있어야 하기에, 대부분의 나라가 판사의 면책특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258쪽에서 “사법면책은 일반적으로 판사가 내린 판결의 실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판사가 기본적인 절차 요건을 위반하거나 판사로서 의무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 그는 징계조치로부터 면책되지 않는다. 판사가 법원의 권한에 속하는 일반적으로 정당성 있는 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독립성을 결여한 상태였다면 – 예를 들어 판사와 재판 당사자 일방이 사건을 어떻게 결정할지를 놓고 사전 합의를 했다면 – 그 판결은 더 이상 사법적 성격을 가지지 못하며, 판사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정치 또는 사법권력으로부터 강요받아 어떤 결정에 이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한계를 소개한다.
판사들이 왜 억압에 동조하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한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이 책의 <역자후기> 내용이 더욱 뚜렷하게 들어오는 것은 아마도 지난 겨울 내란의 밤을 긴장하며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436쪽에서 “사법부는 국가 권력구조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판사는 선거제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든 분쟁과 갈등의 최종 해결을 담당하는 책임을 지고 있으며, 강력한 신분보장을 받습니다. 판사가 현실의 권력에서 독립해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만일 판사가 단지 입법자에 의해 제정됐다는 이유만으로 헌법 질서를 위반하고 자유와 평등을 짓밟는 법을 아무렇지 않게 집행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리 사법부가 경찰과 검찰, 정보기관이 조작한 사건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충분하고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해도 그에 눈감은 채 수사 결과를 판결로 바꾸어준 수많은 사례가 있습니다.”라고 꼬집고 있다.
마지막으로 438쪽에서 “판사들이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취하지도 않고, 오로지 인권과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는 결국 판사 개인이 내리는 도덕적 선택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그 선택이 미칠 인간적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합니다. 법률이 정한 추상적 요건과 법이론에만 매몰되어 구체적인 인간적 상황과 판결이 현실에서 가져올 결과를 무시하는 법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결론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그러한 판사를 길러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가슴을 졸이며 보낸 2024년 겨울은 다행히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을 거치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우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이제 새로운 봄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개혁은 사법부만의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과제입니다.”
사법부가 법치주의의 수호자로 제 역할을 다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우리 모두에게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치밀한 이론적 분석을 통해 여러 단서와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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