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1-06 10:04
[55호] 이달의 정책제안 - 걷고 싶은 울산을 만듭시다!
 글쓴이 : 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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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울산을 만듭시다!

오문완 l 공동대표


칸트는, 걷는다는 것은 가장 주체적인 행위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걸을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의 표징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이렇게 말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삶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걷는 일은 시간을 내서 올레길이나 둘레길을, 울산으로 얘기하자면 솔마루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경훈 교수 말마따나 도시는 걷기 위한 공간이다(이경훈,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푸른 숲). 걷지 못하는 곳은 도시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걷는다는 것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울산은 이런 의미에서 도시로서의 자격을 갖춘 곳일까? 최근 광역시나 기초지자체 모두 걷기 위한 장소로서의 특별공간을 가꾸는 데는 열심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차를 이용해야 한다. 집을 나서서 그곳에 가는 데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을 위험사회라고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걷는 게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은 횡단보도를 보행자에게 돌려주자.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온몸이 경직되는 걸 느낀다. 횡단보도를 건넌다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몸이 먼저 안다는 얘기다. 그만큼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 몸은 고통을 당해왔고 그 고통이 이미 내면화된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자발적으로 서는 자동차를 본 적이 없다. 실은 횡단보도는 보행자가 완전히 건너편으로 건너갈 때까지 모든 차가 서 있으라고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꾸로 돼 있다. 차가 오는지 그 차가 “안전하게”(!?) 지나가는지 보행자가 확인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빨리 빨리의 신화, 경제 제일주의, 성과지상주의가 만들어낸 가치의 역전 현상이다. 이제는 횡단보도를 보행자에게 되돌려주자. 이제는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을 되새겨 볼 때가 아닐까? 차를 몰고 다니는 시민들은 한 주에 한 번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자. 버스를 타러 가는 과정에서, 걸어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야 육교의 문제, 인도의 문제 등 도시의 재설계가 가능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가장 주체적인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