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우리의 지난날도 간다
오문완
버스 안의 풍경입니다. 나이가 있는 사람과 젊은 사람을 구별하는 제 나름의 기준이 있는데요, 뭘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일부)버스의 안내방송을 잘 들어보시면 됩니다. “승객 여러분, 위험하오니 버스가 완전 정차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를 반복해서 들려주지요.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시키는 대로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선 다음에 일어납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미리 내릴 준비를 하지요. 이게 제 관찰의 결과입니다.(물론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불변의 진리가 있으니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습니다만.)
어제 어느 버스 속에서 차가 멈춰 서자 일어서서는 총총걸음으로 문을 향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세상의 변화에 맞춰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미리 준비를 하고 차가 서자마자 곧장 내립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 말하듯이 ‘몸이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업시간에 학생들한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버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차는 어떤 차냐? 여러분도 맞춰보시죠. 감이 오지 않을 겁니다. 힌트? 네 글자입니다. 여전히 모르겠죠? 정답은 개문발차(開門發車)! 요즘은 보기 드문 일이지만, 예전에는 승객이 차에 오르고 문을 닫으면서 동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꽤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짐작하시겠지만 배차 간격 때문이지요. 이윤을 많이 내려면 버스가 빨리빨리 달려서 한 번이라도 더 주행을 하게 해야겠지요. 노동 사건을 접하면서 놀랐던 게 버스 운전자가 정류장을 그냥 지나친다든가 아예 (정해진 노선대로 움직이지 않고) 더 짧은 길로 달려간다든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게 다 배차시간에 맞추기 위한 거죠. 그러다 보니 사고도 많이 내고요. 어느 현수막에서 보았듯이 “속도를 줄이면 안전이 보인”다는데 정반대로 움직여온 것이지요. 단, 노사가 관계가 틀어지면 규정대로 움직입니다. 소위 준법투쟁(遵法鬪爭; work-to-rule)이지요. 준법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습기는 합니다. 법을 지키는 게 왜 투쟁이 되나요?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인데요. 버스는 모든 정류장에 서야 하고 승객의 안전을 확인한 후 운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건 원칙이고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는 얘기지요. 사이가 틀어지면 준법투쟁을 통해 사용자한테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니.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지만 외국에 나가서 버스를 탈 때마다 느끼던 게 있었습니다. 승객들이 버스가 멈춘 후 자리에서 일어나서 느릿느릿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한국에서 몸에 익힌 걸 반대로 하자니 무척이나 어색하더군요. 이들 나라는 돈(경제)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겠지요.
특히 일본이 아주 엄격해 보였습니다. 승객이 있든 없든 모든 정류장에 서고,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면 정류장 출발시간을 지키기 위해 기다렸다가 출발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버스 출발시간이 정확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제 우리나라도 안전이 우선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승객들의 태도겠지요. 저도 아직은 잘 안 되는 일이지만 버스가 멈춰선 다음에 일어나서 차를 내리도록 습관을 바꿔보렵니다. 나쁜 걸 기억하는 몸이 아니라 좋은 습관에 길들여진 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가 몸이 ‘제대로’ 기억한다는 것이 되겠지요.
이상하게도 겨울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입니다. 아니, 박인환의 시이기보다는 박인희의 시낭송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같이 즐겨보시지요.(너튜브 뒤지면 나오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제 이 구절은 이렇게 고쳐 써야 합니다. “세월이 가면 우리의 지난날도 간다.”, “새로운 시대에는 과거의 몸은 버리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이 누더기가 된 원인은 경로의존의 덫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탁월한 분석을 강준만 칼럼에서 읽었습니다.(<‘사람 죽이는 경제’는 안된다>, 한겨레신문 2021년 1월 18일자 26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친절하게 읽을 곳을 소개합니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9133.html)(이 남자의 사는 법!)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은 한번 경로가 결정되고 나면 경로 이용의 타성과 경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 시스템의 관성 때문에 경로를 바꾸는 게 매우 어려워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런 경로는 우리의 의식에도 형성되는 것이어서 우리 모두의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간 긍지를 느껴온 케이(K)-방역이 사실상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의식의 경로 때문이었을 게다.”
세월이 가면 우리의 지난날도 갑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과거의 몸은 버리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 오문완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인권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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