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근로자
최민식 l 상임대표
노동절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내일이 123번째 메이데이입니다. 울산역에서 태화강역으로 바뀐 후 넓디넓은 역 광장은 허허롭기만 합니다. 그래도 오늘만은 역도 광장도 활기가 넘칩니다. 2천여명 남짓한 기념집회 참가자들의 함성이 울림이 되어 태화강 줄기 따라 온 울산에 퍼지길 바랍니다.
새삼 노동절을 생각해 봅니다. 여직 정부의 공식 명칭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5월1일 노동절 행사는 1923년 이후 1958년까지 이어지다 이승만의 지시로 3월 10일에 치러지게 되는 데, 그날이 한국노총 창립일입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이후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뀐 채 이어져 오다 1994년 문민정부 때 5월1일로 공식화 되었지만 이름만은 아직도 ‘근로자의 날’입니다. 한편,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진영은 1989년 100주년 노동절 기념 대회를 기점으로 5월1일 메이데이를 되찾게 됩니다.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한국 전쟁이후 단절되었던 5.1절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말 중에 ‘근로자’와 ‘노동자’처럼 기형적 의식이 투영된 용어도 없을 것입니다. 동일하지만 동일하지 않는 대상, 같은 개념이지만 다른 개념의 허상이라 해야 설명이 가능할 듯합니다. 아직도 ‘노동자’라는 말이 불순하고, ‘노동’이란 말은 노가다(육체노동을 비하한 말)와 비슷한 느낌으로 비하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어이없는 현상은 단연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공입니다. 사전에 의하면 ‘근로(勤勞)’는 부지런히(勤) 일하는 것(勞), 영어로는 work 입니다. ‘노동(勞動)은 일을 통해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 영어로는 labor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부지런히 일하는 것과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과 생산을 한다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입니다. 옷을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정규직일과 비정규직일, 학교에서 교육하는 교사와 급식이나 청소하는 일, 마트에서 물건 파는 일, 레미콘과 플랜트등으로 공장을 짖고 집을 짖는 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이라는 서비스를 생산하는 일, 이 모두가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노동’입니다.
이럴 때 ‘근로’라는 말을 쓰지는 않습니다. 근로부가 아닌 노동부라 하고, ‘근로조합’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노동조합’이라고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와 근로자가 굳이 구분돼 쓰이는 것은 계급적 개념을 배제하기 위한 자본과 권력이 술수입니다. 노동자를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권력과 자본에 순종하는 의식 없는 근로자로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노동절은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에서 벌어진 총파업 시위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절은 매년 9월의 첫째 일요일이다. 세계자본의 맹주다운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헤이마키트 순교자 묘비는 미국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카고 도심의 헤이마키트광장에는 당시 집회 노동자들을 묘사한 기념상이 세워졌습니다. 사건 당시 수레 위에서 연설을 했던 스파이스를 모티브로 한 기념상입니다. 모함과 조작 억지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한 7인 중 한명인 파슨스는 최후 진술에서 “내가 원했다면 자본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도 원치 않는다. 그것이 내가 이 길을 가는 이유이며 또한 그것이 나의 유일한 죄이다.”
2013년 울산 울산 노동절행사 연사로 나서게 된 나도 당시 수레위에서 연설를 했던 스파이스처럼 엄중하고 멋진 연설를 준비했지만 막상 연설은 짧고 굵게 했습니다.
“8시간 노동 보장하라!”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자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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