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5-28 16:00
[54호] 회원글 - 모국어의 힘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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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의 힘

송혜림 l 회원


이 곳 미국에서도 한국인 지역사회를 통해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만날 기회가 많은데요. 이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어떤 책을 읽는지 물어보면, 상황에 따라 다양하지만 일단 영어에 집중하느라 공부 목적의 학습지나 문제지 외에 다른 한국 책은 익히 접하지 않고, 읽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점점 힘들어진다더군요.
그럼 영어책은? 학교교재, 신문읽기는 문제가 없으나 다양한 종류의 문학서적은 대충 뜻은 알아도 뭔가 감동과 느낌을 갖기 어렵다 하네요. 어른이 되면 좀 나아질까요? 이런 경우, 어쩌면 한국어도 또 영어도 모국어가 될 수 없을지 모르니 조금 안쓰럽기도 하던데요.
모국어는 단지 언어가 아니라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루어진 약속과 공감대, 시대정신과 역사, 문화, 즉 경험과 삶의 총체적인 압축인지라,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일 텐데요. 영유아기 언어발달 이론에서는 결정적 시기를 잘 선택하면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할 수 있다 하고 실제로 그런 사례들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닌 듯싶고요.
최근 글로벌이니 세계화니 하여 영어바람 불고, 영재교육? 조기유학으로 이른 나이부터 외국어를 접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행운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이 경우 모국어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노력해도 영 붙잡을 수 없는 것일지 모르니 고민이 되기도 하네요. 결국 행운이란, 조기유학 등등이 아닌, 모국어를 끝내 지킬 수 있는 환경이겠구나 싶어서요.
그러니 언제고 어느 때고 책을 읽으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마음의 끌림과 울림과 떨림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정서를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즉 모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큰 축복이기도 하겠지요.

가수 조용필이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랫말이 (표절시비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종기 시인이 쓴 ‘바람의 말’과 많이 닮아있는데요 (사실 이 시가 더 먼저 나왔다는군요).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회원글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마종기 ‘바람의 말’)

김용규의 ‘철학 카페에서 시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11년)에서는 이 시를,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사랑의 존재론적 거리와 숙명을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그 거리를 영혼으로라도 다가가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과 같이 스치겠다니요(81쪽). 느낌이 오지요?
이 시를 읽다 보니, 문득 대중가요 한 소절이 떠오르는데요, (고인이 된) 김광석이 불렀고, 작년 어떤 가요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다시 불렸던 ‘먼지가 되어’에서는, ‘작은 가슴을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이라고 하지요. 모든 예술의 꽃이라는 ‘시’로도 표현 못할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니 이 얼마나 서럽고 막막한 것일까요.
서러움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고, 바람이 사라지면 서러움도 없어지지만 곧 기쁨과 행복도 따라 사라진다는 것이 지난 번 소개 한 인문학자 강신주의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당신을 알아보고, 그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고요.
강신주에 따르면 서러움이 있어야 글을 쓴다니, 수많은 시인이 그토록 아름다운 시를 쓴 것도 다 이유가 있군요. 바라는 것이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아 서러운 것이 사랑이겠고,

그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더욱 민감하게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니까요. 그러니,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의) 서러움을 읽는 것이다, 라고 하지요.
그래서 시인 이야기를 하자면요, 마종기시인은 젊을 때 미국으로 가 직장생활을 하며 수십년을 살았다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를 잃지(잊지) 않고 이리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으니 본인의 행복이야 말할 나위 없겠지만, 시를 읽고 우리의 마음도 따라 움직이니 참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지요. 모국어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일 터이고요.

봄이어요
...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김용택 ‘그리운 꽃편지’ 중에서)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낸 고단함과 서로에 대한 대견함으로, 따뜻한 바람이 몰고온 설레임으로, 시, 소설, 영화, 노래, 편지....그 무엇이던 좋겠지요, 편안하고 신나게 마음껏 보고 듣고 읽고 쓰고 부르고 말하며, 모국어의 힘을 새삼 깨닫기 좋은 계절, 5월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