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올려도 기분 좋은 두 가지
김혜란
하나,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우리 상담소에 이런 전화가 걸려온다. 본인이 성폭력을 당했는데 임신이 되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낙태를 할 수 있는지 도움을 달라. 또 어떤 날은 피해자 엄마라고 하면서 자녀가 미성년자인데 임신을 했다. 다음 주에 중간고사, 시험도 쳐야 한단다. 아직 주 수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묻는다.
이럴 때는 정말 죄송하게도 이런 답을 드리게 된다. 태도는 엄청 친절해도, “우리 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곳이지만 성폭력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니 경찰서에 가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설명을 하면 설명이 채 끝나기 전에 전화기 너머 한숨이 들리고 전화한 내담자는 딸아이가 아직 어린데 내 아이의 안전한 삶보다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성폭력이 아니라면 지금의 법체계에선 아무도 따져 묻지 못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신고하고 조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인정하지 않았을 경우, 또 다른 다툼이 있는 경우 수술을 해도 되는지는 전문가(?)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우리 사회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국가의 결정, 처분을 기다린다. 대한민국은 여성에게 삶의 조건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고 임신 출산을 암묵적으로 강요해왔다.
그런데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 초기의 낙태를 포함해 낙태를 전면금지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 임신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를 처벌하게 한 법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매우 늦었지만 환영한다.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가치에만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했다는 것이 헌재의 설명이다. 그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낙태죄는 무려 1953년 제정된 이후 66년 동안 유지 되어 왔으며 우리가 비교하기 좋아하는 OECD 회원국 35개국 중 본인 요청에 의한 낙태가 가능한 국가는 25개국, 예외적인 사회 경제적 사유로 가능한 국가는 4개국으로 80% 이상의 국가가 낙태를 허용하고 있었다.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고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유전적 장애가 아니더라도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권한은 여성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매우 늦은 결정이지만 환영한다.
둘, 지난 9월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확정 받았다. 그해 3월 수행비서가 한 방송에 출연해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고 안 전 지사를 검찰에 고소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던, 전 국민이 주목한 사건이 다, 이 사건이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위력”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강간을 가해자의 폭행?협박과 피해자의 저항을 위주로 협소한 판단을 주로 해왔는데 이 사건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 등 총 10건으로 기소되었고 2심에서 9건의 행위가 인정되어 법정 구속되었다. 위력 행사 부분을 성인지 감수성을 토대로 인정하여 “앞으로 직장 내 성폭력은 이렇게 처리하세요.” 하는 업무 관계, 권력형 성폭력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또 안 전 지사의 범행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물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김 씨 진술의 신빙성이 쟁점 중 하나였는데 이 판결은 성폭력 형사 사건에서 피해 진술이 갖는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성인지 감수성을 토대로 해석되고 폭넓게 인정되었다.
# 덧붙임
2020년 올해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다. 비장애인, 남성, 50~60대 중심인 국회에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세상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도 소수자도 국회에 많이 진출하길 바란다.
※ 김혜란 님은 울산동구가정성폭력통합상담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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