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지향
-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박순분 옮김 / 열음사
정리 : 박영철
학력저하를 깨닫지 못한다.
청소년들 자신의 학력에 대한 자기평가가 매우 부정확하다. 학력이 집단적으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학력 저하를 본인은 피부로 느낄 수 없다. 학력이 있을 필요도 없다. 같은 학령집단의 학력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경쟁이 주는 부담은 오히려 가벼워 진다.
어쩌면 무지한 채 살아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있을 수 있다.
‘이거하면 뭐가 좋아요?’
아이들에게 40분이든 50분이든 교실에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공책에 필기하는 일은 일종의 ‘고역’이다. 아이들은 이 ‘고역’을 교사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어떤 재화와 서비스를 ‘등가교환’하는지를 아이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지불하는데 선생님은 무엇을 줄 건가요?”라고 아이들은 묻고 있다.
아이들은 사사건건 “이게 어디에 쓸모가 있나요? 이것을 하면 나한테 어떻게 좋아요?” 라고 물어보게 된다. 대답이 마음에 들면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한다. 이렇게 하여 ‘등가교환을 하는 아이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육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당신은 뭘 팔 건데? 마음에 들면 사주지” 이 말을 교실용어로 바꾸면, “히라가나를 배우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가 된다. 이는 소비주체로서 충분한 상품정보를 파악하여 현명한 소비주체가 되기 위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이 된다.
교육의 역설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은 자기가 어떤 이익을 받고 있는지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말할 수 없다는데 있다.
배움은 시장 원리를 기초로 삼을 수 없다. 이것은 교육의 기본이다.
학습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르고, 학습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가지는지도 말하지 못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이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고, 그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학습의 동기가 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문자를 배울 때도 산수를 배울 때도, 음악을 배울 때도, 아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무엇을 위해 배우는지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 못하는 것이 당연하며, 말할 수 없어야 한다.
아이들은 먼저 ‘변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습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외계의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학습’의 인류학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희망격차사회, 희망을 품는 것조차 격차가 있어야하는 사회, 정말 무서운 사회다.
꿈이 없는, 희망이 없는 아이들, 그저 취직이 유일한 희망인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이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자기책임론으로 덧씌워진 시스템, 리스크 사회에서는 반드시 양극화가 발생한다. 노력에서 아주 작은 투입차가 성과에서 거대한 산출차를 낳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학력의 차’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빙의 차’가 있는 것이다. ‘노력의 차’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다. 노력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에 계층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것이 되며, 그렇다면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이미 이기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이길 것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이 되어 버린다.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일을 한다’는 것을 소비 용어로 생각한다면 모든 노동자는 부당한 교환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노동에 대한 낮은 임금은 원리적으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이란 본질적으로 과잉획득이다. 노동의 성과 중 일부분은 반드시 교환을 위한 자원으로써 저장해 놓아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 그 자체는 등가교환일 수 없다. 노동에 대하여 지불하는 임금은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에서 ‘교환을 위한 자원’을 공제한 나머지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젊은이들의 가슴 밑바닥에는 소비주체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소비행동의 원리를 노동에 대입시키고, 자신이 제공한 노동에 대하여 임금이 적거나 충분한 사회적 위신을 획득할 수 없으면 “이건 좀 이상해”라고 말한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 가는 생성 과정이다. 공부를 끝낸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움의 본질은 지식과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배움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은 노동의 의미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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