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1-06 15:36
[61호] 회원 글 - 자발적 가난의 길, 그 신나고 부러운 길
 글쓴이 : 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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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의 길, 그 신나고 부러운 길



송혜림 l 회원

지난 초여름, 제가 잠시 머물던 미국 오레곤 주에서, 친구를 만나러 어떤 마을을 방문했는데요. 제가 살던 곳 자체가 화려하지 않은 지역이기는 한데, 그 마을에 들어서면서 뭔가 더욱 평화롭고 소박한 기운을 느꼈지요.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웃들을 보면서, 그 마을이 특이한 곳이었음을 알게 되었는데요. 서로 생각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고 계속 모이다 보니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더군요.
가능한 한 전기를 안 쓰고, 채식 중심의 조미료 없는 식생활을 하고요, 생활도구들도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만들어 쓴다는군요. 늘 자신들의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고요.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이면서 예술가이고 또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진지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렇게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반대하는 일 앞에서는 사뭇 단호하고 또 강하기도 하던데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은 끝내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저항감이 그것인데요. 돈을 많이 벌면 세금을 많이 내고 그럼 국방비가 늘어나고 무기구입과 전쟁 등등에 사용되니, 가능하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돈을 적게 번다는군요. 저는 그들에게서 그 어떤 대대적인 반전운동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느꼈는데요.
돈을 적게 버니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할 터인데, 제가 보기에 소박하다 못해 불편하기까지 한 그 삶을,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기 때문에, 익숙하고 또 당연하게 받아들이더군요. 검소한 삶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소득을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기쁨은 그들만이 갖는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롭지 못한 이 땅에 대한 진지한 근심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그 삶을 건강하고 신나게 잘 일궈나가는 행복도 있었지요. 물론,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도 있었고요.
치열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익숙하게 돈과 소비의 노예가 되어가지요, 때로는 의도하지 않게 이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물론 때로는 소외가 되기도 하지요. 지금 누리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못 하면서 늘 이 척박한 사회구조가 불만이었던 저에게, 그 마을 사람들은 ‘높고도 외로운’ 삶의 경지를 알려주었다고나 할까요. 세상에는 참 다종다양의 사람들이 있고 배울 것도 많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기도 하였고요.



이번 12월, 인권연대 독서토론회에서는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북드라망, 2013)를 읽었는데요. 거기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네요. 국가와 자본은 순결이데올로기, 일부일처제의 신화, 교육만능주의, 일촌 간의 사랑 등등을 사회 전반에 걸쳐 촘촘하게 박아놓고 학벌, 직업, 재산이 인생의 기준임을 주입시킨다는 것인데요. 이것을 정상적인 삶이라 확신하니 거기에서 벗어날 엄두를 못 낼 터이고요. 이 정상성의 척도는 모든 욕망을 균질화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삶의 주권을 찾으라 강조하지요. 누구나 노동을 하고 철학을 하는, 누구든지 노동자이면서 작가이며 또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요. 그것을 위해 생각할 권리를 성취해야 하고,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곧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161쪽 이하, 238쪽 이하).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몸도 마음도 분주해 지는 시점이지만, 한 호흡 길게 하면서, 좀 주춤거려보면 어떨지요. 획일화에서 벗어나 개성 그리고 삶의 주권을 찾기 위해, 일상을 배움의 장으로 만드는 지혜를 갖기 위해, 그래서 자유로와지기 위해, 다소 느리게 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해 봅니다.
신형철은 그의 책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에서 그리움과 느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느리게 걸어야만 그리움은 살아남는다, 그래야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율의 세계에서 자유롭고 진정한 것, 인간적인 것을 꿈꾸고 그리워할 수 있다고요.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은 다른 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로운 산책에서 혼자이면서도 다른 사람과 뒤섞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568-570쪽).

인간사 가장 평범한 법칙은,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겠지요. 한 해가 가야 새로운 해가 오고, 이를 계기 삼아 우리는 또 우리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될 텐데요. 각 자의 다짐과 소망을 안고 새 해 잘 맞이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