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4-30 17:28
[184호] 이달의 인권도서 - 말을 부수는 말 / 이라영 지음 / 한겨레 2022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1,327  

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

이라영 지음 / 한겨레 2022 / 정리 : 윤영해



삶은 고통의 한복판에 있고 갖가지 방식으로 그 고통을 견딘다.
세계가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듣지 않는다. 누군가는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누군가는 기약 없이 단식한다. 누군가는 0.3평 비좁은 철창 안에 구겨 넣어지고 누군가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아슬아슬한 꼭대기로 올라간다.
권력은 말할 기회가 너무나 많고 그 목소리를 들으려는 청자는 항상 대기 중이다. 대체로 권력의 크기에 따라 제 고통을 더 말하고 타인의 고통을 덜 듣는다. (...)그래서 권력의 크기만큼 억울함의 목소리가 크다.

이 책은 고통에서 시작해서 아름다움으로 끝난다.
고통, 노동, 시간, 나이 듦, 색깔 억울함, 망언, 증언, 광주/여성/증언, 세대, 인권, 퀴어, 혐오, 여성, 여성 노동자, 피해, 동물, 몸, 지방, 권력 그리고 아름다움, 이렇게 스물하나의 화두를 풀어냈다. 권력의 언어, 곧 ‘압제자의 언어’에 밟히지 않으려는 꿈틀거림이다. (...) 혐오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것에 비하면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 저자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 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 저자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화두를 던지기 위해 쓴다.

이 중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1.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물어봐 준다는 것, 인정받는 고통은 명예를 얻기에 그 고통을 감수하고 고통에 대해 수치심 없이 말할 수 있으면 그 자체가 이미 권위를 갖은 고통은 아닐지.

2. ‘학업과 연구’는 ‘노동’보다 가치 있고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있고 ‘공부 좀 할걸’ 교육열이 높은 이유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은 아닐지.

3. ‘워라밸’은 오히려 노동과 삶을 분리하고 노동의 해방을 말하면서 노동은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지? 노동해방에 관해 말하기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4.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분’의 개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근대화가 되면 될수록 속도가 중요했기에 인간의 시간은 점점 더 작은 단위로 쪼개어졌다. 느림에 대한 부정은 나이가 들면서 몸이 굼떠지고, 생각의 반응이 느려지는 노화를 더욱 쓸모없는 낡음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5. 택배 노동자, 총알 배송, 새벽 배송, 시간은 정말 돈인가? 그렇다면 누구의 시간으로 누가 돈을 버는지 물어야 한다.

6. 소위 ‘저출산 대책’이라고 내놓는 정책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모든 정책이 남성의 삶은 무엇하나 건드리려고 하지 않은 채 여성의 삶만 가지고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은지.

7. 지명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강조되거나 감춰지기도 한다. 경주와 부산 대신 월성과 고리라는 지명을 원전에 붙임으로써 위험이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8. 백인들이 많이 오는 이태원은 ‘다문화’ 거리라 부르지 않지만,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안산은 다문화 거리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다문화’는 배척의 언어는 아닐지.

9. 우리 현실에서 사사로운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정작 다른 사람도 억울해질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관한다. 단 적극적으로 억울함을 밝혀야 할 때가 있다. 내 억울함을 밝히지 않아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억울함을 당할 일이 생긴다면 이때는 적극적으로 밝혀야 한다.

10. 타인의 고통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이 없는 공정은 오직 나의 억울함에 대한 집착으로 향한다. 이 집착은 개인의 억울함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능력과 노력에 바탕을 둔 공정이라는 말로 오역된 억울함이 아니라 ‘다시는’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억울함의 실체를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