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5 15:52
[181호] 시선 하나 - 정치 진영에 빠진 국가인권보장체제의 위기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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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진영에 빠진 국가인권보장체제의 위기

신강협


요즈음 국가인권위원회의 기능이 거의 마비 지경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이후부터 국가인권위원회는 정권에 따라 여러 부침을 거쳐왔다. 이명박 정권 때 조직이 대폭 축소되었고, 이후 보수정권은 집요한 공격을 통해 국가인권기구의 권위를 점차 축소 시켰다. 그리고 지금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인권위는 더욱더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추천하고 현 대통령이 임명한 이충상 위원은 “인권위가 더불어민주당 법안에 대해서는 몇 년에 한 번이라도 반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온전한 인권 관점이 아니라 어느 정당의 발의안인지 고려해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취지다.”라고 발언한다. 보편적 인권 규범이 기준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이충상 위원은 정당에 대한 정치적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인권기구는 ‘정무적 판단’이 아니라 ‘보편인권적 판단’이 전부여야 하는 곳이다. 그 외에도 이충상 위원은 보편 인권규범에 어긋나는 발언을 수시로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김용원 상임위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해병대 채모 상병 사건 관련 진정을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각한다거나, 본인이 위원장으로 있는 소위원회에서 국민이 제기한 진정 건을 볼모로 삼아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행태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5조에서 인권위원의 자격을 “인권 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위원은 대통령(4인)과 대법원장(3인), 국회(4인)가 지명 또는 선출한 뒤 대통령이 임명한다.
위의 두 상임위원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상 국가인권위원으로서 자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현재 인권위원의 지명 및 선출이 모두 정치체제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 4인과 대통령이 지명하는 대법원장 3인, 국회의 여당 몫 2인까지 붙여지면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은 권력에 친화적인 사람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권은 인권위원의 요건에 적합한 인물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이들을 인권위원으로 지명 또는 선출할 수 있게 된다. 그 문제의 정점이 지금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 상황을 만든 것이다.

2003년 3월의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자, 대통령 참모진들이 국가인권위원장을 나무랐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인권위는 원래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곳”이라며 논란을 마무리 지었다. 국가인권위는 그런 일을 그렇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정치적 진영이 아니라 보편인권규범 아래서 보편적 인권의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관한 국제 원칙(일명 ‘파리원칙’)은 국가인권기구의 구성과 구성원의 임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국가인권기구의 구성과 그 구성원의 임명; 선거의 방법에 의하든 혹은 다른 방법에 의하든 인권의 보호와 향상에 관련된 (시민사회의)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다원적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보장(B.구성과 독립성 및 다원성 보장)”해야 한다.

파리원칙은 크게 책무성, 독립성, 전문성으로 국내에서 요약한다. 책무성은 인권 보장에 대한 책무가 국가에 있다는 뜻이고, 독립성은 권력에 대한 감시 기구이니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문성은 현재 국내에서 이해하는 바와 파리원칙이 이야기하는 바가 다르다. 여기서 전문성은 다양한 사회 계층들의 대표성을 반영할 수 있는 전문성을 이야기한다. ‘다원성’으로 이해해야 적확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대법원에서 3인을 위원으로 추천하는 것은 파리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이다. 인권을 법적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인식이 작동된 것이 아닌가 싶다. 파리원칙 B항을 다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추천 및 임명을 정치체제가 점유하는 것을 해소해야 한다. 파리원칙 B항에서 구성원의 다양성을 언급하면서 시민사회인권단체 및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 그룹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국가인권보장체제는 국가인권기구설립에 관한 국제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형태가 된다.
국가의 대표로서 대통령이 국가인권위 구성을 임명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국가인권기구의 구성원에 대한 추천과 선정과정은 새롭게 다시 구성해야 한다.

예컨대 태국의 경우, 다양한 인사들로 구성된 인권위원선발위원회에서 1차로 검증된 후보를 국회에서 표결을 통해 결정한다. 또한 인권위원을 선발할 때 인종, 출생국, 종교, 성지향성 등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하는 영국처럼 인권위원의 자격 기준을 명확하게 할 필요도 있다.(“파병 반대” 맞짱 뜨던 ‘인권위 독립성’ 지금은 만신창이, 한겨레신문 2012.7.19. 인용)

필자는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은 시민들과 인권시민사회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보추천위원회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후보 추천된 위원의 정보공개가 이뤄지고 시민들에 의한 공개적 검증 과정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의 김용원, 이충상 위원은 당연히 사퇴해야 한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의 언행에서 인권적 감수성은 찾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격이 없다.
이런 국가인권보장체제의 위기에 맞서, 이번 기회에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보다 개혁적인 방식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 국회가 구성되면 국가인권기구가 갖춰야할 인권적・국제적 기준에 맞게 국가인권위원회를 재구성하기 위한 논의와 법 개정 등이 과감하게 추진되길 빌어본다.

※ 신강협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이며,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