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5 15:50
[181호] 시선 둘 - 당신의 주변에는 어떤 예외적 존재가 있습니까?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1,524  
당신의 주변에는 어떤 예외적 존재가 있습니까?

희정


시간이 부족해 강의 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시간 배분을 잘못했다.
우선 질문부터.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생각해보자. 무엇이 필요할까? (각자 답을 떠올려 보자.) 이때 ‘내 주변에 퀴어가 없는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면, 그 이야기는 나중에. ‘왜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어야 하지?’라며 질문 자체에 반발이 들었다면 그것도 이 글 끝에 가서 이야기해보자. 우선은 강의 때 한 답을 이야기하려 한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첫째, 성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합시다.
둘째, 성평등한 언어를 사용합시다.
셋째, 동료의 사생활을 존중합시다.

성중립적으로 표현이란,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묻는 대신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애인 있어요?”라고 하는 일. 모든 사람이 이성(만)을 연애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성평등한 언어 사용은 ‘남자라면 그래야지’ ‘여자가 왜 그러니?’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동료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연애 안 해요?”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것. 직장에서 “남자친구랑 주말에 뭐 했어?” 같은 질문만 사라져도, 성소수자들이 겪는 ‘거짓말 스트레스’가 꽤 줄어든다. (거짓말 스트레스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반복해서 거짓을 말해야 할 때 겪는 부정적 감정과 긴장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요즘 세상에서 ‘예의’ 정도로 치부되는 일들이다. “왜 결혼 안 해요?”를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날 강의를 위해 참고한 글의 제목도 <성소수자 동료와 함께 평등한 일터 문화를 만들기 위한 에티켓>이다. 말 그대로 에티켓. 성소수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예의와 배려. 예의를 지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그런데도 이 세 가지 실천을 말한 까닭이 있다. 의심하기 위해서다.

남자와 여자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나눠진 사회에서, 평등한 언어를 쓰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것을 의심해야 한다.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로, 저출산이 아니라 저출생으로 단어가 바뀌어 간다. 이 변화는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라는 이전 시대의 ‘자연스러움’이 깨져가는 과정이다.

앞서 이런 말을 했다. ‘남자친구 있어요? 라고 묻는 대신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애인 있어요? 라고’ 해야 한다고. 아니, 애인 있어요? 라는 질문도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고. 그런데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왜 ‘남성과 여성’인가. 어순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과 여’가 아닌 ‘여와 남’으로 써본다. 아무래도 어색하다. 악과 선. 불행과 행복, 모부母父와 자부子父가 묘하게 어색한 것처럼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 앞에 오는 단어가 있다. 당연히 ‘남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언어가 있고, ‘여자’의 몫이라 여겨지는 일도 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곳곳에 존재한다. 세상에 가득한 그 당연함을 의심할 때, 이 사회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치우거나 숨겨둔 존재들이 보인다.
세상이 이들을 숨겨버렸기에 사람들은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거나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까. 동명의 책을 집필할 때, 인터뷰를 위해 온 성소수자 직장인들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직장에선 성소수자가 아닌데,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될까요?”
직장에선 성소수자가 아닌 이들이 있다. 퀴어 친화적인 공간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내 주변에는 퀴어가 없는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면, 이번엔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해보자.
왜 내 주변에는 퀴어가 없을까?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그 당연함을 의심해보는 시간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서로가 초면인 다소 어색한 모임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 소재가 퀴어 문화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한 이가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퀴어 이런 사람들이 많대요.”
그러니 성소수자들을 무조건 거부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내 전작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그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주변에 그런 사람 있나요?”
그는 나름 퀴어 친화적인 대화를 하려 했지만, 내 쪽은 ‘그런 사람’과 ‘우리’의 구분을 곱십느라 이쪽은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식어버렸다. 대화 맥락상 그가 말한 우리란 ‘그런 사람’이 아닌 이가 분명한데, 그는 초면인 나를 어찌 알고 비성소수자 그룹인‘우리’에 넣어준 것일까.
퀴어에 관한 이야기를 할지라도, 마주한 상대가 성소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대화가 진행된다. 이성애자로 사는 일(성적 지향)은 너무 당연해서 누구든 이성애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나서 부여받은 성별로 평생을 사는 일(성 정체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이 자연스러움 앞에서 ‘다름’을 가진 사람은 예외가 되어 버린다.

이 세상은 너무나 당연히 a가 기본인 사회이다. 초면에 만나도 ‘우리’가 될 수 있는, 너도 나도 당연히 a인 사회. a가 보편이고 표준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a가 아닌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한다고 해도, a 이외의 것은 ‘예외’일 뿐이다. 예외적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숨긴다. “내가 퀴어인 걸 모르잖아요. 그게 차별이죠.”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에서 대표 문장을 뽑으라면 이것이겠다. 그가 퀴어인 것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보편’의 세상이 있다. 그 사회가 자체가 차별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퀴어가 없는 이유이겠다. 자신이 ‘예외’로 존재하는 공간에서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에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예외로 만드는 그 당연함을 의심하는 일.

그런데 왜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이어야 하냐고?
오늘 당신이 거리에서 만난 장애인은 몇 명인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장애인이 없어도 이상할 것 없는 공간, 퀴어가 없는 것이 당연한 공간, 아픈 사람(질환자)은 들어올 수 없는 공간. 이 세상이 문턱을 높여 숨기고 가린 예외적 존재는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존재를 분류하고 분리해, 자신을 보편적이고 정상이라 믿고 사는 이들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정말로 나 자신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물어보고 싶다만, 이번에는 원고 자리가 부족하다. 역시나 분량 실패이다.

※ 희정 님은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