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9-28 17:51
[105호] 여는 글 - 그냥 평등한 것 일 뿐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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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평등한 것 일 뿐

이승웅


24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 목적이란 것은 나중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타고난다는 것이다. 즉 노예는 노예의 목적을 가지고 귀족은 귀족의 목적을 가지고 여자는 여자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자기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주인은 주인다운 역할을 노예는 노예다운 목적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평등한 것이 아니라 태생부터 차별지어 진다는 관점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배자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제공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기 약 200년 전에 석가모니가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 하늘 위 하늘 밑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것이다. 이는 나 혼자만 귀한 존재이고 나 외의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보면 미물인 지렁이도 자기 자신은 존귀하다는 것이다.
즉 내가 존귀하듯이 나 외의 것도 존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삼라만상은 자기 자신이 존귀하므로 어느 누구도 우등하니 열등하니 또는 귀하다든가 천하다든가 할 수 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충이니 효이니 하면서 그런 공기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왔다. 즉 나라에는 충성을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도록 교육 받아왔다. 물론 나라를 위해 개인인 나를 희생하여야 하고 부모를 위해 자식인 나를 희생하여야 함은 당연하다는 것에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부도덕한 일부 지배자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를 위한다는 형식의 틀에 맞추어 희생을 강요받아왔고 개인의 권리는 부당하게 침해되어 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어른을 공경하여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당연히 연장자를 공경하고 위함이야 굳이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그리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장자를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연장자의 입장에서 어린사람을 무시한다든가 그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닐진대 현실은 종종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당연히 공경 받아야만 된다는 집착에 사로 잡혀 그것이 해소되지 않을 때는 어린사람의 권리에 침해되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 또한 다반사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남성은 여성의 인권을 유린해 왔다, “여자가 감히?” “여필종부” 이런 말들이 난무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문화를 혹자는 “한의 문화”라고들 한다. 이 한을 구성하는 부류가 약한 자, 못 배운 자, 가난한 자, 여자 등등 피지배계층일 것이다. 이 중에 중심이 여성이 아닐까 한다. 여성이야 말로 한의 문화에 중심에 있는 것이다. 태어나서는 부모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종처럼 사는 것이 우리나라 여성들 아니었는가? 소위 “여필종부”니 하면서…….
남편은 아내가 죽으면 당연히 재혼할 수 있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이 죽으면 재혼 불가였고, 청상과부로 한 평생 그 집 귀신이 될 때까지 고된 삶을 살았다.
기껏해야 “열녀문”이나 세워서 그 혼은 기렸으나 이 또한 여성의 인권을 착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조선시대)에는 그랬다.

유교의 정신은 우리나라의 중심적 사상을 이루었고 본래 공자가 가르친 유교사상은 이렇진 않았는데 배운 자, 가진 자, 지배계급들이 왜곡하여 피지배계급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비겁한 것이다.
우리의 나는 그 누구에게도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단지 평등한 개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배웠다고, 가졌다고, 힘세다고, 영리하다고 어떠한 누구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있질 않다. 좀 더 넓게 보면 강아지나, 소나, 돼지나. 나와 평등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닌 것이다.

원래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이런저런 쇠사슬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때론 종교적 신념 때문에 때론 문화적 이유 때문에 구속되고 얽매여 살고 있고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점점 더 쇠사슬은 조여 오고 더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주신 권리 이 천부적인 인권에 앞서는 문화가 어디에 있고 종교적 신념이 어디 에 있고 이데올로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사람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자의 신체와 남자로 규정되어지는 정신을 가지면 남자, 여자의 신체에 여자로 규정되어지는 정신을 가지면 여자로 일컫는다. 사람은 이런 두 종류의 남자와 여자만 있는 것인가? 남자의 신체에 여자의 정신 혹은 여자의 신체에 남자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비정상적인가? 설사 비정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사람으로서 가지는 권리는 없는 것인가? 더 나아가 한 몸에 남자의 신체적 특징과 여자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 또는 여자의 정신과 남자의 정신특징을 동시에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남성의 신체에 여성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남성에게 이성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색깔은 흑색과 흰색만 있는가? 파란색도 있고 빨간색도 있다. 어찌하여 사람은 남자와 여자만 존재하는가? 위에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의 성의 특질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남성과 여성만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편견이요, 인식의 오류다. 이 오류에 근거하여 동성애(혼)를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동성애 부분은 우생학적, 문화적, 윤리적 문제 등 고려하여야 할 부분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누구나 누구를 사랑하든 어떤 성을 사랑하든 기본적으로는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당사자의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의 선택에도 국가가 개입하는가? 이것이 정당한가? 여기서부터 소수성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는 것이며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이란 말인가? 잘났다, 못났다,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옳다, 그르다, 이 모든 것은 인식의 오류일 뿐이다. 이 오류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한 평등은 요원할 것이고 인권은 항상 침해할 것이고 침해당할 것이다.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살아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 이승웅 님은 세무사이며, 울산인권운동연대 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