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29 10:44
[153호] 여는 글 - 한가위에 읽는 시는?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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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에 읽는 시는?

오문완



추석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으신가요? 물론 다 달리 대답하겠지요. 그래서 오로지 제 자신 얘기만 하자면 저는 노천명 시인의 ‘장날’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일단 시를 읽지요.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이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차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저는 기억력이 아주 나빠 꼬마 때 추석을 어떻게 맞고 보냈는지, 바로 이거지 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추석하면 이 시를 떠올리는 것은 추석은 이런 모습일 거야 하는 일종의 향수(鄕愁)일까요? 향수라면 고향이 있어야 하니 고향이 뭔지 찾아봐야겠네요. 권위 있는 곳이 국립국어원이라 들어가 봅니다.

고향(故鄕)「명사」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어, 이건 내가 생각하는 고향이 아닌데!’ ‘이러면 마산이 고향이 되나?’ ‘마산은 별로 와 닿지 않는 곳인데…’ 불편한 마음에 책장에 꽂혀 있는 국어사전을 찾습니다. 民衆書林(한자를 모르는 세대를 위해 친절하게 ‘민중서림’이라고 표기해 둡니다.)에서 내놓은 民衆엣센스國語辭典(第三版)(1990, 초판은 1974년에 나왔다고 써있군요.)을 뒤집니다.

고향(故鄕) 「명」 ① 제가 나서 자라난 곳 ②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

고향에는 ① 제가 나서 자라난 곳만 아니라 ②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도 포함된다는 얘기입니다. 전통적으로는 ②번이 우세했다고 기억합니다. 고향이라는 개념이라는 게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가문의 문제라고 이해해 왔을 터이니까요. ‘그래 이래야 제주가 내 고향이 되지!’ 조금은 안심을 하면서도 또 다른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런데 1990년에는(언제까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상의 생활 근거가 고향이었지만 이제는 그건 아니고 자신이 나서 자란 곳만 고향으로 바뀐 건 아닌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하간 어떤 고향이든(①번 고향이든 ②번 고향이든) 마산서 나서 전국을 헤매고 다니던 저한테는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고향의 정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천명의 장날에서 묘사하는 시골에 꽂히는 이유는 무얼까요? 마치 시인의 고향이 제 고향인 양 느끼는 이유는?

그래서 이 시에 대한 반응을 물어봤습니다. 우선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노공감; 집에 가면 맞아주는 건 룸메 선생”(우리나이 31세 남성)
“아주 공감감다. 강아지는 신이 주신 선물임다”(33세 남성)
“이십리 길을 걸어 대추와 밤을 팔아야 추석장을 볼 거 아니가. 이쁜 딸한테 대추도 못주고~~~새벽에 떠난 길이 돌아오니 캄캄한 밤이 되었잖니.”(59세 여성)
나이든 여성이야 공감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30대 남성들(?)이 공감하지 못하는(물론 강아지에 공감한다는 동문서답도 있었지만) 건 세대차일까요?
제 지도반 학생 18명한테도 문자를 보내봅니다. 9명이 답을 보내왔네요.(응답률 50%, 놀라운 수치죠. 이래서 통계란 건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영 엉뚱한 결론을 사실인 양 주장하게 되죠.) 한 학생만 이 시를 잘 모르겠다고 하고 다른 여덟 학생은 시인의 정서에 공감(共感)한다고 답했습니다. 어, 20대는 절대 다수(8/9)가 공감하는 건가? 젊은이들은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에만 꽂힌다는데...

다시 시로 돌아와서 이 시는 1939년에 발표됐답니다. 그 먼 옛날 얘기에 지금도 공감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이런 식의 답을 댈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1930년대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시기였습니다. 농경지가 황폐해져 농사짓지 못하는 땅이 된 Dust Bowl이라는 표현이 이 시대를 대변합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당시 상황을 잘 그려주고 있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기를 경험한 미국인들한테 물어보면 “그때가 좋았어!”라고 답한다고 합니다. 왜 좋았을까요? 가난하지만 그 가난을 같이 나누었기 때문이겠지요. 꼭 같이 1939년의 조선, 그 암울한 시기도 나누어서 좋았겠죠.
코로나 이후를 말하면서 위드 코로나(With Corona)가 화두입니다. 그래서 위드 코로나의 조건은 무엇인가가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무얼까요? 공감이고 나눔일 겁니다.

[저는 한가위를 맞는 심사로 이 글을 씁니다만, 회원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이미 추석 따위는 잊었을 테니 글에 대한 온도가 다를 건 뻔 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글 쓰는 게 썩 마땅치는 않습니다.(?!) 그저 독거(獨居)노인(老人)의 넋두리이거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오문완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인권연구소 소장입니다.